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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5

by 0l목 2025. 4. 16.

 

 

 

 

   얼마 전에 샤워하는데 환풍구로 벌레 한 마리가 날아들어왔다. 육각형 모양인데 노린재였던 듯. 쨌든 처음에는 환풍구에서 뭐가 걸린 줄 알았다. 찌르르르르르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거품칠이 끝나면 확인해야지, 하는 순간 무언가가 머리 옆을 지나쳐 눈앞으로 날아갔다. 벌레였다. 너무 놀라 피부가 찌르르르르르 떨렸다.

   벌레는 구석에 안착해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는 듯 고정된 자세를 유지했다. 나도 최대한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내가 움직이면 저 새끼가 뭔 짓을 할지 모른다'는 감각을 공유 중이었다. 어쨌든 나도 벌레를 굳이 죽이고 싶진 않았다. 여기서 갑자기 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고민 하나 오픈. 바로 '집에 들어온 벌레를 주저없이 때려잡는 버릇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살생은 지양하고 싶다는 미약한 양심은 영역 안정성 확보라는 강고한 본능에 압살 당했다. 근데 사실 노린재가 뭐 영역 안정성을 헤쳐봤자 얼마나 헤친다고. 웬일로 내 미약한 양심이 수세를 잡아 일단 벌레를 내비뒀다. 그렇게 벌레는 미동하지 않고 나는 슬금슬금 거품질을 하며 우리는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했다.

   문제는 거품칠을 그렇게 얌전히 끝냈으나 물은 뿌려야지 않는가. 이대로 침대로 갈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물을 틀었다. 따끈따끈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온수를 슬그머니 몸에 뿌리기 시작했다. 물이 찰박찰박 차올랐다. 환경 변화를 눈치챈 벌레가 심하게 동요했다. 눈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었다. 벌레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날아오르면 어떡하지...? 불길함은 금방 현실이 되었다. 벌레는 결국 날개를 찍 펼치더니 드론처럼 날아올랐다.

   언젠가 벌레들은 사람이 사람인 줄 인식하지 못하고 거대한 물체로 인식한다는 얘길 본적이 있다. 그래서 몸에 달라붙거나 날아드는 거라더라. 주워들은 만큼 공신력 없는 얘기지만, 어쨌든 그 벌레는 내가 무슨 물을 피할 만한 나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대로 수직 상승하듯 1초간 붕 날아오른 벌레는 몇차례 짧게 회전했다. 이내 내가 선 방향을 바라보며 멈췄다. 그러더니 하얀 배를 보여주듯 몸을 세웠는데(까만 벌레는 배도 까만색일 줄), 그건 사실 몸을 세운게 아니었다. 자신이 정한 방향으로 날아가기 위해 마치 몸을 세운 모습처럼 배를 아래로 기울인 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벌레는 물을 피할 만한 나무로 나를 택한 모양이었다.

   기겁을 했다. 물을 맞고 있던 김에 반사적으로 샤워기를 뽑아 분사하기까지의 일련의 행동에는 어떤 고민이나 의지가 깃들어있지 않았다. 본능이었다. 진짜 죽을 위기의 벌레보다야 적은 수준이었겠지만 공포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배가 하얀색인 게 진짜 공포였다. 시력이 좋아서 하필이면 그 통통함까지 단번에 느껴졌다. 살면서 노린재 배를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나는 그 배를 향해 물을 뿌려댔다. 벌레는 물을 후드려 맞았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몇 차례 더 날아오르려던 벌레는 그대로 고꾸라졌고 바닥으로 철푸덕 떨어졌다.

   이미 젖은 벌레는 추정컨대 더 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생은 지양하고 싶다는 미약한 양심이 결국 이번에도 영역 안정성 확보라는 강고한 본능에 압살당하고 말았다. 나는 즉시 그 위에 물을 더 뿌렸다. 뜨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도의 물을 맞고 있는 걸 좋아하는 나는 느꼈다. 이 온도라면 벌레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제야 미약한 양심이 완장을 차고 강고한 본능을 밀쳐냈다. 얼른 샤워기를 다시 내 몸으로 돌렸다. 따끈따끈 기분이 좋았다. 이게 아닌데. 여하튼 벌레에게 물을 뿌리는 행위는 그렇게 멈춰졌다. 벌레는 물을 타고 배수구로 흘러내려가 바디워시 거품 아래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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