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클레어 데더러
- 출판
- 을유문화사
- 출판일
- 2024.09.30
★★★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사실 어떤 지표를 기대하고 본 책이었는데 그보다는 공감을 구할 수 있던 책이었던 것 같다. 물론 어떤 지표 역시 존재하지만, 결국 이와 같은 고민의 근원은 무엇인지, 이를 또한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등 생각보다 한걸음 물러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시야를 얻은 것 같아 만족스럽다.
👇 읽던 중
너무 매력적인 작품의 너무 쓰레기 같은 창작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단순히 창작물에 한계 되는 고민이 아니다. 농구팬으로서는 농구선수로서 너무 매력적인 선수가 여성 편력 문제로 지저분한 사생활을 가지고 있을 때, 프로레슬링팬으로서는 레슬링 역사의 레전드가 극우 정치인을 지지할 때 등 이런저런 방면에서 맞닥뜨린 이와 같은 문제들로 수도 없이 고민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를 좋아했다. 좋은 작품을 만든 감독과 좋은 캐릭터를 분한 배우를 좋아했다. 그들 중 일부가 사회면에 등장했을 때의 허무함과 배신감을 셀 수도 없이 겪어왔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열 번을 넘게 보면 처음만큼의 고양감이 느껴지지 않는 법인데, 이런 면에 있어서는 처음만큼의 분노가 변함도 없이 느껴지는 게 억울했다. 스스로를 캔슬 컬처에 한몫하는 소비자로 인식하는 만큼 그들의 작품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졌다. 그런데, 그러면 다일까? 안 보면 그만인가? 거기서 내 사고는 끝이어야만 하나? 그런 의문에 대한 표지판을 찾길 기대하며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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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황당하게도 이거 얼마 전에 팔로미나 컹크와 색다른 지구?라는 개골때리는 다큐형 코미디 혹은 코미디형 다큐멘터리 보면서 기억에 남았던 단어라 글에서 짚고 넘어가는 역사적 관점을 바로 이해함. 조나 웃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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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녀를 유기한 엄마들 < 부분을 읽는 중인데, 작가 만큼이나 나 역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자식들을 유기한 엄마'라는 이름의 괴물들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공감하고 어떤 면에서는 합리화하는 것을 발견했다. 스스로 캔슬 컬처에 제법 잘 녹아든 편이라고 생각했고, 나이를 먹으며 그런 면이 좀 느슨해지긴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 인간'을 방치한 인간에게 일면 공감하다니.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 황당함이 느껴졌다. 그러자 어떤 괴물들(이 경우엔 보다 폭력적인 인간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합리화하는 대중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은 기분이다. 결국은 모든 단순한 답들과 마찬가지로, 공감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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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오는 문제적 유명인들(창작자들)에 대한 논란의 사실관계를 확인해보고 싶은데 일차적으로 스트레스가 너무 과도하게 유발되고, 이차적으로 해외 자료를 찾아봐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진다. 특히 마이클 잭슨에 대한 성범죄 고발 다큐는 너무 오래도록 그 진위 여부로 충돌이 많아서 무엇이 진실인지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 「자기 자신에게 언제라도 물어야 하지만 묻지 않는 것. 나는 괴물인가 혹은 이것이 곧 인간이라는 의미인가?」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 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나도 그 모순 한가운데에 있었다.
- 하지만 잠깐만 멈춰서 비판적인 글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가 과연 누구일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도피용 비상구다. 우리는 가볍다. 우리는 개인의 책임을 은근슬쩍 내려놓는 동시에 손쉬운 권위라는 탈을 쓰는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자신이 전부 알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중도 남성 비평가의 목소리다. 우리는 부패한 단어다. 우리는 속임수다. 진짜 해야 할 질문은 다음이다. 나는 어떤 예술을 사랑하면서 그 예술가를 미워할 수 있을까? 당신은 할 수 있나? 내가 '우리'라고 할 때의 우리는 '나'를 의미한다. 나 그리고 당신 말이다.
- 십 대 때 일기에 "오늘은 남자들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 2017년 가을에도 나는 남자들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고, 다른 많은 여자도 남자들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많은 남자들 또한 남자들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부장도 가부장제에 실망했을 터였다.
- 권위가 말하길, 작품은 작가의 삶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권위가 말하길, 자서전은 오류라고 한다. 권위는 작품이란 이상적인 상태(역사를 초월한 곳, 고산, 설원, 순수)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권위는 창작자의 이력과 과거사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무시하라고 말한다. 권위는 그런 것들에 코웃음을 친다. 권위는 자서전과 역사와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남성 제작자의 편을 든다. 관객이 아니다.
-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역사에 무관심할 수 없고 인물의 이력에 면역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역사의 승리자들이다. (지금까지는) 그 승자는 남성이다.
- 우리가 도덕적 감정을 느낄 때 자아도취라는 감정은 결코 뒷자리에 오지 않는다.
- 얼룩은 모든 것을 건드린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작품은 착색되었고 이제 우리는 이 작품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 팬은 점차 작품에 의해 정의되어 간다.
- "어떤 사람이 연예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정신 건강의 척도다."
- 우리는 우리의 선호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듯 행동한다. 이것이야말로 후기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따져보면 비판의 목소리는 권위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끝도 없이 흐르는 판단의 강 같은 것이며 그 안에는 주관적 의견이 넘실거릴 뿐이다.
- 작품은 한 타입의 창작자(다시 말해 남성)로부터 나와 그와 같은 타입의 독자(역시 남성)에게 전달된다. 이 창작자에게는 이상적인 관객이 있다. 그 관객에게도 이상적인 창작자가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양자 관계의 바깥에 자리하고 있다.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 역학 안에 포함되진 않는다. 물론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하면 된다. 우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 너무나 오래 중심을 차지하는 남성을 배제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남성들은 자신의 관점이 중심이 아니고 여러 관점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 "나도 이런 세상에서 백인 남자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갈 때 언제나 비난받는 대상이고 싶지 않아요. 세상에 대고 말하렵니다. 나는 이제부터 흑인 레즈비언 하겠습니다."
- 파이튼 같은 구닥다리 비평가는 이제껏 한 번도 제외된 적이 없어서, 자신이 커다란 집단의 일부였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 그룹은 자신들이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지만 자신들에게 편견이 있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 "역사와 완전히 무관한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작고한 작가 랜들 케넌이 2019년 미시시피 대학교 강연에서 던진 질문을 나는 항상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의 감정은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겪은 순간과 상황, 그 이전에 우리를 스쳐 간 순간과 상황에 복무한다. 여기에 이 말을 더하고 싶다. 과연 어떤 반응, 어떤 의견, 어떤 비평이 역사와 완전히 무관할 수 있을까?
- 도나 해러웨이는 객관성이란 "아무 근거도 없는 정복자의 시선"이고 "환상이나 신의 장난"이라고 말한 바 있다.
- (나는 전직 십 대 괴짜 클럽의 정회원으로, 이 종족들의 영원한 팬이다)
- 천재는 지배자인 반면 다른 얼굴도 갖고 있다. 그는 하인이다. 무엇의 하인일까? 자기 천재성의 하인이다.
- 남성성의 수행, 그 수행과 천재성이 결합되면 여성들에게는 그리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 여성들은 이 천재의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영원히 천재 클럽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에덴 동산』은 천재가 된 그가 치른 대가에 대해서도 재고하게 만든다. 헤밍웨이는 딱 한 종류(남자)가 되고 그 반대가 되지 못했는데, 그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가?
- 이 천재의 자질은 나쁜 행동의 정당화로 생각하기는 쉽지만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나쁜 행동에 끌리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천재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 그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이 유대인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점까지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배기 "피해자는 오히려 나"라는 헛소리다.
- 바그너의 관점에서는 "나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가 거짓이고 위선이다.
- 그녀는 히틀러가 평소에는 여자 운전자를 병적으로 불신했지만 자기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잘 올라탔다며 또다시 즐거워한다. 그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다른 여자를 보면 "'조심해, 여자 운전자!'라고 소리 지르곤 했습니다." 자신만큼은 예외였다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성 괴물성이다. 나와 같은 성이 인정받지 않는 곳에서 나만 인정받을 때의 기쁨. 👈이거 정확히 내 어린 시절 모순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생각해 속이 시원했다.
- 왜 울프의 반유대주의는 잊혔을까? (...) 그들의 반유대주의를 직면한 뒤에도 그것을 역사 안에서 그들의 순간과 관련 있는 어떤 것으로, 마치 반유대주의는 그 시대의 날씨처럼 작가들에게 불어닥친 것으로 생각한다.
- "우리는 비유대인에게 항상 물었어. '너희는 우리를 숨겨 줬을까?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를 숨겨 줄 거야?'"
- 우리는 과거의 괴물이 창작한 예술을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그곳에서, 그 괴물성 안에서 우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를 찾기보다는 우리 모습을 비춰 줄 거울을 찾아야 한다.
- 회고록은, 최악의 경우, 자신의 특별함에 대한 길고 긴 아우성이다.
- 롤리타는 보호를 받고 있지 못한 까닭에 완벽하다. 그녀의 완벽함은 그녀의 취약성, 이용 가능성, 접근 가능성에 있다. 이것들이야말로 대부분의 평범한 범죄자, 변태들이 추구하는 완벽한 조건이다.
- 열세 살 소녀가 『롤리타』를 읽으며 느낀 분노와 지친 감정은 사실 정확했다. 나보코프와 험버트를 혼동한 부분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롤리타의 존재감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 내가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한 부분이 중요했다.
- 이 세상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 결핍을 항상 알아채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결핍된 사람들이 우리 자신이어도 그렇다.
- 작품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으로 경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예술가를 생각해 내기는 쉽지 않다고요? 캘빈 톰킨스 씨, 저는 바로 한 명이 떠오르는군요. 아나 멘디에타라고 아시나요?
- 제도권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제도가 승인하는 방식에서 자신의 의견과 존재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끔은 창피하고 시끄럽고 멋있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해야 할 때도 있다.
- 내가 아는 여성 예술가와 작가들은 지금보다 더 괴물처럼 되기를 소망한다. 은근슬쩍 농담조로 말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돌봄의 의무는 모두 저버리고 예술가로서의 이기적인 의식만을 수행하고 싶다는 뜻이다.
- 나의 여성 괴물들에 대한 초기 목록은 짧았고, 그들의 죄는 항상 모성과 관련 있어야만 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직무 유기의 모성과 관련이 있었다. 남자의 범죄가 강간이라면 여자의 범죄는 양육의 실패다. 여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일은 아이를 저버리는 것이다.
- 애나 울프를 잡아먹는 것은 집안일뿐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기, 즉 오늘날에 감정노동이라 지칭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여자/엄마 역할을 해낼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에 긴장한다.
- 분노는 우리 시대 여성의 질병이었다. 나는 이 병을 여자들의 얼굴에서, 목소리에서, 사무실로 날아오는 편지에서 본다.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부당한 현실을 향한 원망이고 이 독성 어린 분노는 비개인적이다. 이 병이 비개인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운 나쁜 사람들은 분노를 남편이나 연인에게 돌린다. 나처럼 운 좋은 여자는 이에 맞서 싸운다. 👈'화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 디스키가 말하길, 레싱은 훗날 디스키도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젊은이에게 똑같이 베풀라는 당부만 했다고 한다. "레싱의 제안은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는 일이라기보다는 능력과 필요를 기준으로 한 행운의 적절한 분배 같았다." 레싱의 좌파적 원칙은 그만큼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 "(...) '우리 할머니는 좌절한 시인이자 뮤지션이었어. 할머니는 경첩이 부서질 때까지 부엌문을 차 버리기도 했어.' 어쩌면 나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엄을 진심으로 아꼈지만 계속 생각했더랬다. '나는 결국 우리 할머니처럼 될 거야. 부엌문 경첩이 떨어질 때까지 문을 차버릴 거야.' 그래서 '안 하는 게 낫겠군'했다. 마음이 정말 아팠다."
- 선언문은 우리를 채찍질한다. 처음에는 그녀의 분노에 수긍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얼음송곳을 엉덩이에 꽂아야 한다는 부분에서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하고 한탄하게 된다.
- 너무나 거대하고 소모적이라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고 잊히고 당연시되는 힘에 맞서는 일상적 투쟁을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페미니즘(혹은 해방 운동)이라 할 수 있겠는가?
- 내 안의 가장 최악의 것, 가장 괴물 같은 것을 말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내가 부분적으로 괴물이었다면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부분적으로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 피셔는 책에서 고립된 소비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 소비의 비도덕성을 받아들이라 요청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비를 윤리적 선택의 장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정답은 이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광경에 갇히게 만든다. 그래서 피셔가 후기 자본주의의 공기라 부르는 이 분위기에 더 연루되고 만다.
- 우리가 괴물 남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미투가 실제로 해야 하는 일에서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사건이 터지면 비평가들은 곧바로 "그래서 그 X의 작품은 다 버릴 겁니까?"라고 물으면서 자본주의의 시녀가 되어 문제의 초점을 가해자와 가해자를 지지하는 시스템에서 개인 소비자로 옮긴다.
- 개인의 해결은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자들의 이상이다. (...) 자유주의는 시스템에서 시선을 돌려 개인 선택의 중요성에 더 집중하기를 원한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개인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비자의 선택과 연동된다. 당신의 소비가 당신이다. 당신은 결국 당신의 팬덤이다.
- 우리는 물건을 살 때 판단력을 발휘하여 도덕성을 구현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통제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광경에 더 갇히게 된다. 👈 캔슬 컬처의 한계를 깔끔히 정리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 다시 말해서 정답은 없다. 당신이 그 정답을 찾아야 할 책임도 없다. 책임감이란 케케묵은 생각이며 비극적으로 제한된 소비자의 역할을 강화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권위자도 없고 권위자가 있어서도 안된다. (...) 당신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없다. 사실 소비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당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막다른 골목을 만날 뿐이다. 👈 일면 방관적인 자세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소비의 한계를 명확히 짚어줘서 속 시원하다. 속 시원하다는 감상이 유독 많은데, 갈피를 못 잡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글이라 그런 것 같다.
- 우리가 사랑하는 괴물 같은 사람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 이 세상의 모든 사랑과 마찬가지로 예술 사랑도 내밀한 경험이고 그 사람의 본성에 따라 다르다.
- 끔찍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당신이 엄마를 여전히 사랑하고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 부분에서 예기치 못하게 코끝이 찡해온 것은 엄마로부터 거부당해 온 기억을 아직까지도 끌어안고 내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내 자신을 문득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사랑은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판단을 옆으로 유보하는 결정에 달려 있다. 사랑은 무정부 상태다. 혼돈이다. 우리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차가운 기후와는 완전히 다른 기후 시스템인 감정적 논리에서 결점투성이의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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